금태조 아골타
중원<북부>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 그의 시조는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것은 전설이나 야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와 금 건국시 송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에 명확히 나오고 있다.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온 신분이다” (금사본기 제 1권, 세기)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는 중국말 왕과 같다”(송막기문)
금사와 송막기문
고려에서 온 신분이며 신라인인 금시조.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해 계산해보면 금 시조 함보가 여진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말, 고려 초다. 당시 신라와 고려의 왕조교체기였던 한반도의 사정을 생각하면 두 사서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골타의 조상 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함보, 그는 누구인가?
<동명해사록>에 함보의 9대손 아골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조선의 유학자 김세렴은 여진족의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며 조선 최고가문 권행의 후예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권행의 본래 성은 金(김)씨였다.김행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외손인 금의 시조.당시 족내혼을 했던 신라 왕실의 관습을 고려하면 그의 성이 金(덧말:김)이며 신라의 후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동명해사록>의 금 시조와 <금사>의 함보는 과연 동일인인가?
신라 후예인 왕족과 발해 후손의 왕비족이 세운 나라 금
함보를 시조로 둔 금 황실은 발해인<遺族>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 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발해 698∼926년>
청 황실의 성씨도 김씨였다.
청태조 누루하치
금 멸망후 (372년후인) 1616년, 여진은 다시 후금을 세웠다.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이다.그런데 청나라 황제 성은 아이신 줘러였다. 아이신愛新)이란 금(金), 줘러覺羅)란 겨레(族)부족 씨 등을 뜻한다. 결국 금 부족, 김씨들이라는 뜻이다.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그의 후예인 금 황실, 청 황실까지 그들은 모두 금을 뜻하는 김(金)씨들이었던 것이다.
만주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小 考
본 작품은 중국 동북공정을 의식한 자료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금사(金史), 송막기문(松漠記聞),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 등을 출전으로 삼아 주장한 요지(要旨)는 중국의 북부를 제패(制覇)한 金나라의 황실 선조가 고려(신라) 사람이고 국호 금은 신라종성 金氏에서 유래한 것이며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의 국성(國姓) 아이신줘러(愛親覺羅) 역시 김족(金族)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특히 동명해사록<김세겸 기행문>을 인용 금 태조 아골타가 경순왕의 외손이고 우리 시조 태사공의 후손이라 하였다. 천식(淺識)이 출전과 관련 사료의 원문과 졸역(拙譯)을 함께 실어 금시조의 태사공 후예설을 밝혀 본다.
1. 金史 卷一 世紀
<金史 : 元나라 脱脱 등이 편찬한 중국의 正史로 태조의 7대조<스페샬은 9대조라 하나> 함보까지 계보와 군림기간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본 논제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서(史書)이다.>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 兄阿古廼好佛 留高麗不肯從曰 後世子孫 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 保活里居耶懶 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 太祖自言 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 蓋自謂阿古廼之後 石土門迪古乃保活里之裔也 及太祖敗遼兵于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幹答剌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始祖至完顏部居久之 其部人嘗殺它族之人 由是兩族交惡鬨鬭不能解 完顏部人謂始祖曰 若能為部人解此怨 使兩族不相殺 部有賢女 年六十而未嫁 當以相配仍為同部 始祖曰:“诺。”乃自往谕之曰:“杀一人而斗不解,損傷益多。曷若止诛首乱者一人,部内以物纳偿汝,可以无斗,而且获利焉。”怨家从之。乃为约曰:“凡有杀伤人者,征其家人口一、马十偶、牸牛十、黄金六两,与所杀伤之家,即两解,不得私斗。”曰:“谨如约。”女直之俗,杀人偿马牛三十,自此始。既备偿如约,部众信服之,谢以青牛一,并许归六十之妇。始祖乃以青牛为聘礼而纳之,并得其赀产。后生二男,长曰乌鲁,次曰斡鲁,一女曰注思板,遂为完颜部人。天会十四年,追谥景元皇帝,庙号始祖。皇统四年,号其藏曰光陵。五年,增谥始祖懿憲景元皇帝。
<중요부분 해석 :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函普)로 처음 고려(高麗)를 거쳐 왔는데 나이가 60이 넘었다.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면서 ...... .동생인 보활리(保活里)만 함께 와서, 시조는 복간수(僕幹水) 연안의 완안부(完顏部)에 살았고, 그 동생은 야라(耶懶)에 살았다. 그 뒤에 호십문이 갈소관으로 돌아오니 태조(아골타)가 혼자 말하기를 그 조상 3형제가 서로 헤어져 떠났다 하고 그들이 아고내의 후손이라 이르고 서토문의 적고내는 보활리의 후손이라 이르더라. ...... 시조가 완안부로 와서 오래 살았는데 그 부족이 일직이 다른 부족의 사람을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이 서로 미워하고 싸워 풀 수 없었는데 완안부 사람이 시조에게 이르기를 만일 부족이 이 원수를 풀어 두 부족이 서로 살상을 않게 함이 현명하다 하니 현숙한 여자가 있어 나이 60인데 시집가지 않아 당연히 서로 배필이 되어서 이내 같은 부족이 되었다.> 스페샬에는 인용하지 않았으나 금사 성씨고에도 관련기록이 있으니
(7卷) 姓氏考 “完顔 金始祖自新羅來居完顔部因以爲氏..
<완안은 금나라 시조가 신라로부터 완안부에 와 살았는데 그래서 성이 되었다.>
2. 松漠記聞
<松漠記聞 : 宋 洪皓가 금에 억류중인 휘종(徽宗) 흠종(欽宗) 부자(父子)의 구출 교섭차 金에 갔다가 그 역시 북만주(北滿洲)에 근10년<1129~1143> 억류되면서 견문을 기록한 책으로 여진-거란-발해 관련 연구에서는 제법 신뢰성이 높고 비중있게 취급되는 사료(史料)이다. 北宋 二帝 1127年 被擒>
女真酋長 乃新羅人號完顏氏 完顏猶漢言王也 女真 以其練事後隨 以首領讓之兄弟三人 一爲熟女真 酋長號萬戶 其一適他國 完顏年六十餘 女真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即胡來也 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姪阿骨打之弟謚曰文烈者爲子 其後楊哥生子闥辣(달랄)乃令文烈歸宗
<중요부분 해석 : 여진의 추장은 신라 사람으로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은 중국말로 왕과 같은 것이다. 여진은 일을 익혀 뒤따르고 우두머리를 3형제가 사양하였는데 하나는 숙여진이 되고 하나는 다른 나라로 갔다. 완안은 60이 넘어 여진이 여자로 아내를 삼아주니 또한 60이 넘었다. 2아들을 낳으니 그 맏이는 바로 호래다. 이로부터 3사람을 건너 양가태사에 이르러 아들이 없어 그 조카 아골타의 동생 문열이라 시호한 자를 아들로 삼았는데 그 뒤에 양가가 아들 달랄을 낳아 이내 문열은 생가로 돌려보냈다.>
3 滿洲源流考
<滿洲源流考 : 중국 청나라 때의 만주 풍속 지리지이다. 아계(阿桂) 등이 황제<高宗 乾隆帝>의 명에 따라 부족, 강역(疆域), 산천, 나라의 풍속 따위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상세히 기록하였다. 1739년에 간행되었으며, 총 20권으로 되어있다.>
新羅王金姓 相傳数十世 則金之自新羅來無疑 建國之名亦應取此
역 : 신라 임금은 김씨가 수십세를 전하였으니 곧 금나라의 신라로부터 온 것은 의심할 것이 없고 나라를 세운 이름도 응당 여기서 딴 것이다.
<건륭제(乾隆帝)는 금시조의 이름 함보를 합부로 정정하였고 금, 청왕조가 신라에서 왔음을 단정(斷定)하였다.>
4.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
<동명해사록 : 조선 인조 때 문신 김세렴(金世濂:1593~1646)이 일본에 사행(使行)한 기행문(紀行文)으로 논제 부분은 1636(인조14) 9. 3 경주를 지나면서 천년고도에 대한 감상문(感想文)이다.>
<仁祖14=1636>九月初三日甲辰陰
發慶州.......新羅之後,金傳雖降而麗王竝。其外孫完顏阿骨打。卽權幸之後。乃能宰割中國。傳世百年。豈非所謂神明之後者耶。......<역 : <仁祖14=1636>9뤌초3일은 흐렸다. 경주를 출발하여 ......신라의 뒷날에 김부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가 합병하였으나 그 외손 완안아골타는 바로 권행의 후손으로 나중에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을 代이었으니 어찌 이른바 신명의 후손된 자라 않으리요?....>
스페샬 작자의 함보의 경순왕 외손설은 동명해사록을 인용한 것으로 아골타의 선조중 고려(신라)에 살았던 사람은 함보뿐이다. 즉 함보만이 경순왕의 사위나 외손이 될 수 있고 또 태사공의 아들일 수 있다. 논리를 성립시키면 태사공이 경순왕의 사위가 되고 함보가 태사공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4분의 在世를 비교컨대 함보가 태사공의 아들일 수는 있어도 태사공이 경순왕의 사위는 될 수 없고 함보가 경순왕의 외손일 수도 없다.
경순왕 : 882~978(927~935) 敬順王 生年:慶州金氏 系譜硏究(2009 春,夏本)
함보 : ***~960(941~960)
왕건 : 877~943(918~943)
권행 : 867~933(927~***) 태사공(권행)의 생몰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고려태조가 아부(亞父)라 하였으니 태조보다 10年長으로 추정. ( )내(內)는 군림기간(君臨期間)
김세렴은 사학자가 아니고 기술(記述) 부분의 출처도 없으며 현존 타 문헌에 외손설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세렴이 어떤 근거로 경순왕의 외손이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태사공 후예설을 뒷받침할 문헌은 금 건국에 관한 고려사기록인데
高麗史14卷-世家 睿宗10년(서기1115)
是月<正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活羅多子. 長曰劾里鉢,季曰盈歌,盈歌最雄傑得衆心. 盈歌死,劾里鉢長子*烏雅朿嗣位*烏雅朿卒,弟阿骨打立”
<중요부분 해역 : 어떤이가 말하기를 "옛날 우리 평주(平州=황해도 평산))의 승려 금준(今俊)이 <고려를> 도망쳐서 여진의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분이 바로 금의 시조라고 이른다." 어떤이는 "평주의 중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여진의 아지고촌에 처음 들어가서 여진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불렸다. 고을이 활로태사(活羅太師)를 낳았다. 활라가 아들이 많으니 맏이는 핵리발이고 먁내가 영가인데 영가가 가장 웅걸하여 묻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고 핵리발의 맏아들 오아속이 자리를 잇고 오아속이 죽으매 돌생 아골타<金 太祖>가 섰다.">
금의 건국사실을 기록하면서 전문(傳聞) 2가지를 실었는데 전자는 평주 중 금준이 여진으로 넘어가 금의 선조가 되었다 하고 후자는 평주 중 김행의 아들 국수(克守)가 여진으로 넘어가 금 태조 아골타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바 후자가 우리 시조와 성명은 일치한다.
국역동국통감(2021.02.06. 轉寫)
봄 정월
○생여진(生女眞)의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황제를 칭하고 이름을 민(旻)으로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은 흉노(凶奴)의 여러 부락과 같아서 성곽(城郭)이 없이 산야(山野)에 흩어져 살며, 문자가 없어 언어(言語)나 노끈을 맺어서[結繩] 약속을 하였고, 지방에 돼지·양·소·말이 풍요한데, 말은 준마가 많았다. 그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어 아이 적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아 잡으며, 자라서는 활시위를 당기면서 말을 달리며 싸움을 익히어 경병(勁兵)이 되지 않음이 없는데, 여러 부락이 각기 서로 웅장(雄長)이라 하여 통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땅 서쪽은 바로 거란이며, 남쪽은 곧장 우리나라의 국경이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기어 매양 내조(來朝)할 때마다 부금(麩金)·초피(貂皮)·양마(良馬)를 바쳤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역시 은폐(銀幣)를 후히 주어 보냈는데, 해마다 항상 이러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나라 평주(平州)의 승려인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를 김지선(金之先)이라 불렀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에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의 여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하고, 고을태사가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는데, 활라태사에게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막내를 영가(盈歌)라 하였는데, 영가가 가장 웅걸(雄傑)하여 군중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자리를 잇고, 오아속이 죽자 동생 아골타가 서게 된 것이다.”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 예종 10년, 을미년(乙未年), 1115년 (국역 동국통감, 1996. 11. 30.)
여기서 고려사의 후자와 금사의 선조기록을 비교하여 보자.
系譜比較
스페샬에는 金 太祖 阿骨打가 함보의 9代孫이라 하나 7代孫이다.
函普→烏魯→跋海→綏可→石魯→烏古乃→劾里鉢/頗刺淑/盈歌→烏雅束/阿骨打
금사 世紀에 태조의 祖까지는 生卒年 및 君臨期間(遼의 節度使)과 治績을 기술하고 7代祖(始祖)까지 系譜와 事蹟 및 陵墓까지 기록하였으며 중, 한국 공히 왕조를 개창(開創)하면 가통(家統)을 미화(美化)하고 4代까지 추존(追尊)하는 겻이 통례(通例)이나 금(金)은 7代祖까지 추존하였으니 계보(系譜)와 사적(史蹟)이 문헌(文獻)으로 전래(傳來)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여 함보의 형제와 자녀까지 기록하면서 先考는 언급이 없으니 아쉬운 바다.
함보가 나말(羅末) 여초(麗初)에 여진으로 넘어간 것은 통설인바 941년에 완안부 추장(酋長)에 군림한 것으로 기록하고 1115년에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였으니 1世 23.3년으로 비정(比定)된다.
7. 결론
금나라 시조 함보가 신라(고려)에서 북만주로 이주한 부분은 확실하고 신라 김씨임도 수긍이 가나 태사공 후예설은 고려사 예종 10년조의 혹자의 말과 김세렴의 감상문뿐인데 관련사서와 괴리(乖離)가 커 앞으로 신빙성(信憑性)있는 사료가 더 발굴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參考資料
○高麗史節要 睿宗 3년(1108)
尹瓘 吳延寵 拓俊京 등이 女眞과 싸워 이겨 9城을 쌓음.
○高麗史節要 睿宗 4년(1109) 6월
<전략>
褭弗等奏曰,昔我太師盈歌嘗言,我祖宗出自大邦,至于子孫,義合歸附,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중략>
요불 등이 아뢰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대국<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의리로 귀부해야 합당하다 하였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중략>
王御宣政殿門,引見褭弗等,許還九城,褭弗感泣拜謝
왕은 선정전에 거둥하여 요불 등을 인견하고 9성을 돌려 줄 것을 윤허하였다. 요불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사례하였다.
http://www.ddokbaro.com/2286 金太祖 高麗人說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oolchamp&logNo=60177539072&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又假說
http://blog.daum.net/wprkffid7/8360936 꿈꾸는 사람들(경주김씨 金始祖 太師後裔說)
東溟先生集卷之九 (一善金世濂道源著)
海槎錄[上]
<仁祖14=1636>九月初三日甲辰陰
發慶州。登鳳凰臺。臺在紅門外。高數十丈。言是築土所成。若此者羅列城南殆十數。舊都想必在臺南矣。半月城在南。金庾信墓在西。鮑石亭,瞻星臺,金藏臺俱莽蒼可望。新羅立國千年。統合三韓。一時文獻。粲然可觀。事佛太勤。寺刹遍於閭閻。豈不惜哉。鷄林金櫃之說。雖出國乘。野人之言。無稽至此。但見國中金姓太半。新羅之後金傳雖降。而麗王竝. 其外孫完顏阿骨打。卽權幸之後。乃能宰割中國。傳世百年。豈非所謂神明之後者耶。問崔孤雲上書莊。不能對。良久發行。午抵仇於驛。玄風縣監兪 汝諧,長鬐縣監梁 應涵 來待。玄風下吏金興龍等數十人。官婢雪梅數十人來謁。饋以酒饌。先是上使以玄風縣監不送渡海小童。是簡吾行也。令捉致三公兄。余以爲玄風下人。咸喜舊使君來。不當刑訊吏輩。以缺其望。且其倅卽我交承也。古人重交承。不當折辱。上使笑而從。蔚山府使吳 暹 亦來候。左兵使許 完 送人問安。卽余表堂叔。未及兵營五里又送人。卽入兵營。從事官隨至。旋向蔚山。聞上使將以明日直到東萊。遠不可得達云。
위키백과 금준의 주석
금준(今俊)은 평주의 승려이다. 금준이 김행(金幸)과 동일인이며 금나라의 시조이고, 아골타의 선조이다. 부안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행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형제들은 남아서 두 형제는 부안김씨의 선조가 되고, 다른 형제 김교는 통천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경우 3형제라는 전설과 달리 4형제가 되는 것이다.
東史綱目 甲寅年 文宗 28년(송 신종 희령 7, 거란 도종 함옹 10, 1074)
춘2월 왜인(倭人)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추9월 최치원(崔致遠)의 5세손 선지(善之)를 녹용(錄用)하여 도염서사(都染署史)로 삼았다.
○ 동여진(東女眞) 추장 오고내(烏古迺)가 죽고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
옛날 우리나라 평주(平州)
【안】 지금 영흥(永興)이니,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지금의 평산(平山)으로 썼는데 잘못이 아닌가 한다.
의 중[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숨어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金)나라의 조상(祖上)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평주의 중 김행(金幸)
【按】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에는 김행을 고려조의 공신 권행(權幸)이라 하였는데 어디에서 상고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女眞) 여자를 취(娶)하여 고을태사(古乙太師)를 낳았고, 고을(古乙)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다. 활라를 일명 오고내(烏古迺)라 하는데, 여러 부(部)를 역속(役屬)시키니 요왕(遼王)이 생여진부절도사(生女眞部節度使)로 삼았으며 기강이 점차 확립되어 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자,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
그곳의 풍속은 흉노(凶奴)와 같아 여러 부락에는 성곽이 없어 산과 들에 분거하며, 문자가 없어 언어(言語)와 결승(結繩)으로 약속을 삼았다. 그 땅에서는 돼지와 염소ㆍ소ㆍ말 등이 많은데, 말은 준마가 많으며 간혹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것도 있다. 그곳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운데 아이들이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히며, 장성하면 활 쏘고 말 달리지 않는 자가 없으므로 싸움에 익숙하여 경병(勁兵)이 되었다. 제부(諸部)가 각기 서로 자웅(雌雄)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하였다. 그 땅은 서쪽으로는 거란과 접해 있고, 남으로는 우리나라의 경계와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 및 우리나라를 섬기어 매번 와서 조회(朝會)하되 부금(麩金 사금(砂金))ㆍ초피(貂皮)ㆍ양마(良馬)를 예물로 하므로 우리나라도 또한 은폐(銀幣)를 후히 주어 보내었다.”
【안】 당 형천(唐荊川 형천(荊川)은 당 순지(唐順之)의 호=明 嘉靖年間에 三大家의 1人, 武編著述)의 《 송감(宋鑑)》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금(金) 나라의 선조에 함보(凾普)라는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고려에 살다가 60여 세에 그의 형 아고내(阿古迺) 및 동생 보활리(普活里)와 이별하고, 생여진에 가서 완안부(完顔部) 복알수(僕斡水) 강가에 살면서 60세 된 여자를 얻어 아들 오로(烏魯)를 낳았으니, 함보가 금나라의 시조(始祖)가 된 것이다. 오로가 발해(跋海)를 낳고 발해가 유가(綏可)를 낳았다. 흑수(黑水)의 옛 습속에는 방[室]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 없이 옮겨 살았다. 유가가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 하였는데, 이것은 한어(漢語)의 거실(居室)과 같은 뜻이다. 유가는 뒤에 헌조(獻祖)라 불렀다. 유가가 석로(石魯)를 낳았는데 석로는 여진에 서계(書契)가 없고 약속(約束)이 없어 검제(檢制)할 수가 없어서 차츰 법규[條敎]로 다스려 부락이 점점 강성해졌다. 이때에 오히려 문자가 있었는데도 관부가 세월(歲月)과 회삭(晦朔)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연수의 길고 짧음을 상고할 수가 없다. 뒤에 소조(昭祖)라 호칭하였다. 석로가 오고내(烏古迺)를 낳았는데 능히 제부(諸部)를 역속 시켰다. 때에 요(遼)의 오국포섭부절도(五國蒲聶部節度) 발을문(拔乙門)이 반(叛)하여 요가 이를 토벌하자, 오고내는 요병(遼兵)이 깊숙이 쳐들어와 그곳 산천(山川)의 험이(險易)를 모두 알아버릴까 두려워하여 곧 요에 알리고 발을문을 엄습해서 사로잡아 바치니, 요주(遼主)가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고 생여진부절도사(生女眞部節度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오고내가 요나라 국적에 매이기를 싫어하였으므로 요주는 사신을 보내어 이를 효유하였다. 이미 절도사가 되었으니 관속(官屬)이 있어 기강이 점차 확립되었다.”
《속강목(續綱目)》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부내(部內)에는 철(鐵)이 없어 이웃 나라가 갑주(甲冑)를 가지고 가서 팔면 반드시 값을 후히 내놓았다. 철을 많이 사들인 뒤에는 궁시(弓矢)를 수리하고 기계(器械)를 구비하여 병세가 점점 떨치자 전후로 붙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淸史稿
<撰者 趙爾巽1844年-1927年),字次珊,号無補。中国清末漢軍正藍旗人,清朝遗老。祖籍奉天鐵嶺。清末政治、軍事人物,曾任四川總督、湖广总督、東三省總督、清史馆馆长。《清史稿》的主修者,奉天講武堂的創辦人。遺著有《刑案新編》、《趙留守攻略》等。现有赵尔巽墓位于北京市怀柔区怀北镇神山村北。>
太祖承天广运圣德神功肇纪立极仁孝睿武端毅钦安弘文定业高皇帝,姓爱新觉罗氏,讳努尔哈齐。其先盖金遗部。始祖布库里雍顺,母曰佛库倫,相传感硃果而孕。稍长,定三姓之乱,衆奉为贝勒,居长白山东俄漠惠之野俄朶里城,号其部族曰满洲。满洲自此始。元于其地置军民万户府,明初置建州卫。越数世,布库里雍顺之族不善憮其众,众叛,族被戕,幼子范察走免。又数世,至都督孟特穆,是为 肇祖原皇帝,有智略,谋恢复,殲其仇,且责地焉。于是肇祖移居苏克苏浒河赫图阿喇。有子二:长充善,次褚宴。充善子三:长妥罗,次妥义谟,次锡宝齐篇古。
锡宝齐篇古子一:都督福满,是为兴祖直皇帝。兴祖有子六:长德世库,次刘阐,次索长阿,次觉昌安,是为景祖翼皇帝,次包朗阿,次宝实。景祖承祖业,居赫图阿喇。诸兄弟各筑城,近者五里,远者二十里,环卫而居,通称宁古塔贝勒,是为六祖。景祖有子五:长礼敦,次额尔衮,次界堪,次塔克世,是为显祖宣皇帝,次塔察篇古。时有硕色纳、加虎二族为暴于诸部,景祖率礼敦及诸贝勒攻破之,盡收五岭东苏克苏浒河西二百里诸部,由此遂盛。显祖有子五,太祖其长也。母喜塔喇氏,是为宣皇后。孕十三月而生。是岁己未,明嘉靖三十八年也。
<태조의 휘는 누르하지로 그 선조는 대략 금의 유족이다. 시조는 포고리옹순으로 어머니는 불고륜이라 부르는데 주과를 감응하여 잉태하였다고 전한다. 차츰 켜서 삼성난을 평정하니 여러사람이 패륵(추장)에 추대하였다. 백두산 동쪽 아막혜의 들 아타리성에 살았는데 그 부족을 일러 만주라 하니 만주는 이에서 시작되었다. 원나라는 그 땅에 군민만호부를 설치하였고 명나라가 처음으로 건주위를 설치하였다. 몇 대를 지나 포고리옹순의 족속이 그 무리와 좋게 지내지 않아 무리가 배반하여 (포고리옹순의)족속이 죽임을 입었는데 어린 아들 범찰이 달아나 면하였다. 또 여러 대를 지나 도독 맹특모에 이르니 이가 조조원황제가 된다. ......아들이 둘 있어 맏이가 충선이고 ....충선이 아들 셋이니 ....다음 다음(셋째)이 양보제편고이다. 아들이 하나이니 도독 복만인데 이가 흥조 직황제이다. ..흥조는 아들이 여섯이 있었는데.....(넷째)가 창안이니 이가 경조익황제가 되었다. .....경조는 아들이 다섯이 있는데 ...(넷째)가 탑극세이니 이가 현조선황제가 되었다......현조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태조는 그 맏이다. 어머니는 희탑나씨로 이가 선황후가 되었는데 13달을 잉태하여 낳으니 이해가 己未 명나라 嘉靖38년(1559)이다.>
布库里雍顺(始祖)⇝⇝范察⇝⇝孟特穆(肇祖)→锡宝齐篇古→福满(興祖)→觉昌安(景祖)→塔克世(顯祖)→努尔哈齐(太祖)
後金 : 여진족(女眞族)의 족장(族長) 누르하치가 1616년에 만주에 세운 나라. 1636년에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다
http://www.khaan.net/baikal/man/agolta.html 고려인의 후예였던 진(金)시조 아골타
즉 여진족은 고려와 긴밀하였으며 그래서 많은 여진인이 고려에 귀화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고려인 금준은 나이 30세부터 전국을 방랑하다가 성숙사에 찾아들어 스님이 된다. 그곳에서 동주관원의 부인과 정을 통하다가 들켜 국경을 넘어 여진족이 사는 동북지방으로 피신했다. 금준은 병고치는 의원으로 자처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 아지고촌에서 촌장의 딸 3남매를 부인으로 삼았다.
금준은 아들을 데리고 지금의 만주땅으로 이주해 "너희들은 무술을 익혀 흩어진 여진족을 통합하여 거란을 치고 중원으로 들어가라"며 아들들에게 여진족의 통합을 역설했다.
후에 금준의 손자 핵리발과 영가는 완안부를 평정했고 핵리발의 둘째 아들 아골타가 금을 건국했다는 것이다.
[만주원류고]에는 금의 시조가 고려인 금준으로 그의 직계아들이 아골타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황해도의 김함보가 금태조 아골타의 8대조부라고 나와있다.
이밖에도 진(金)의 시조가 고려인 또는 신라인이라는 기록과 전설들이 많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고려때 윤관장군이 변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9성을 쌓은후 여진사신들이 고려임금에게 이를 되돌려 달라고 간청했는데 "예전에 우리 태사영가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귀국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라는 서신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당시 9성의 위치는 현재의 함경북도 변방으로 알려져 있으나 간도지방까지 설치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금나라의 건국당시 만주에는 고구려계 발해유민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114년 10월 요동 철주에 사는 발해유민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본다.
http://blog.daum.net/arkantoss/135 금황(金皇) 태조(太祖) 아골타(阿骨打)의 선조(先祖)인 신라인(新羅人) 김함보(金函普) <역사스페샬의 要旨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