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시에서 정리한 ‘디지털당진문화대전 (항목 ID: GC06400650;
[*주석:2010년대 후반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임]에 보면,
병사공 휘 餘慶께서 1600대를 전후하여 鹽率에 터전을 잡으신 것이
현재의 해미종중의 세거지 형성의 시작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아래와 같다.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에는 고려 시대 ‘염솔부곡’이 있었다고 전하는 지역이 있다. 그곳은 6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하성리(下城里)와 우산리(愚山里)에 안동권씨(安東權氏)가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입향조는 권여경(權餘慶)[1565~1639]이며,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을 찾다가 정착하였다. 정미면의 안동권씨는 현재 400년 가까운 연륜을 간직하였고 농업과 학문에 종사하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주석: 廉率 部曲은 충청도 해미현(海美縣) 의 소재지 북쪽 36리에 있었다.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唐津市) 정미면(貞美面) 지역에 해당한다. 鹽率]. 《新增東國輿地勝覽 20, 忠淸道, 海美》
안동권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모두 벌열 가문[*주석: 대를 이어 양반 벼슬 세력으로 행세한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 중기의 청렴한 관리인 권수평(權守平)[?~1250, *주석: 樞密公파 중시조, 10세]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개국 공신인 권근(權近)[1352~1409], 세조 때의 정난공신인 권람(所閑堂 翼平公 權擥[1416~1465]: *주석: 樞密公파, 18세, 조 權近, 부 權踶,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번지에 세 분의 산소가 있다. 한편, 익평공의 넷째 따님은 남이 장군의 배위, 여섯째 따님은 중종의 왕후인 단경왕후의 모친).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權慄[1537~1599] *주석: 樞密公파, 22세, 都元帥, 忠壯公) 등이 인물이 있다. [*주석: 이 연구원의 필자는 안동권씨 추밀공파 파보만을 집중 참고한 것 같다].
고려와 조선에 걸쳐 재상급 41인, 경신(卿臣)[현재의 장관급]이 108인, 대제학 7인, 봉군된 인물이 70인에 이르며 시호를 받은 인물은 60인에 달한다. 또한 서원에 배향된 인물이 62인이며 각종 공신에 책록된 인물은 87인에 이른다. 그 외에 충절로 이름 높은 인물이 74인, 효행으로 이름 높은 사람은 63인이다.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우산리에 입향한 인물은 시조의 25세손 권여경이다. 권여경은 삼도 병사(三道兵使)와 황연 병사(黃延兵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인물이다. 권여경은 말년에 한적한 시골로 낙향하기로 마음먹고 동서 두 명과 함께 전국 유람을 하게 되었다. 맏동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韓致謙), 작은 동서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李碩賢)라고 전한다. 일행은 우연히 정미면 하성리를 지나면서 최고의 명당을 발견하였다. 북서 방향으로 자모산을 등으로 하며 남동 방향으로 멀리 간대산과 봉화산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중앙에는 냇가가 흐르고 있으며 양쪽으로 구릉지가 안온하게 펼쳐져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권여경은 하성리에 집터를 잡았다. 맏동서인 청주 한씨는 인근 마을인 서산시 성연면에 자리를 잡았고, 작은 동서인 전의 이씨는 정미면 봉성리에 자리를 잡았다.
권여경은 서울로 올라가 생을 마쳤고 권여경의 아들 대부터 본격적으로 정미면에 정착하여 세거지를 이루게 되었다. 족보에 따르면 권여경의 아들은 셋인데 맏아들은 권욱(權昱), 둘째 아들은 권담(權曇), 셋째 아들은 권성(權晟)이다. 권욱은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자손들이 정미면 대조리·매방리·하성리·도산리 등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둘째 아들인 권담은 과거에 급제하고 흥양 현감(興陽縣監)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이르렀는데, 자손들이 정미면 우산리에 세거지를 이루면서 정착하였다.
이들은 시조의 9세손인 문하시중 권융(權融)을 거쳐 10세손 시중 권인가(權仁可)의 후손으로, 시중공파라고 한다. 그 후 18세손인 우사간(右司諫)을 지낸 권삼(權參)에서 갈라져 나오기에 사간공파(司諫公派)라고도 하며, 20세손이며 이조 정랑을 지낸 권기(權琦)에서 갈라지기에 이정공파(吏正公派)[이조 정랑공파(吏曹正郞公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후 낙향조인 25세손 권여경이 병사(兵使)를 지낸 까닭으로 병사공파(兵使公派)라고 한다. 결국 직접적이고 가장 가까운 권여경을 따라 이들은 병사공파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 정미면 하성리와 우산리는 서산군 해미현 소속이었는데, 해미 향교의 『선생안(先生案)』을 보면 안동권씨 인물이 유난히 많다. 이들은 모두 14명인데, 15회에 걸쳐 도유사, 혹은 전교를 보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선생안』에 기록되어 있는 전체 성씨 중에서 의령 남씨와 함께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이는 안동권씨가 뛰어난 유학자를 상당수 배출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진시 정미면의 안동 권씨 문중에는 권씨와 관련하여 세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첫째는 ‘반월정(半月亭)’ 전설이다. 현재 당진시 정미면 하성리 반정재[半亭峙]에는 반월정의 터가 있다. 반월정은 99간 집이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 권씨가 이곳에 와서 반월정을 짓고 살았는데 하루는 노비 한 사람이 도망했다. 권씨는 수소문하다가 끝내 제주도에 숨어 있던 노비를 잡아오게 되었다. 그 후 노비는 다시 도망갔는데, 도망가기 직전에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반월정에 불이 붙자 그 불길은 수십 리 밖에서도 보였고, 기왓장이 불에 튀어 멀리 날아갔다. 그중에 『남화경(南華經)』이란 책이 덕삼리의 간대산(艮大山)에까지 날아와 떨어졌다고 전한다.
두 번째는 '권여경 전설'이다. 권여경은 풍수지리에 매우 밝았다. 권여경이 지금의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쪽에서 낚시를 하는데 항상 밥을 싸 가지고 갔다. 그런데 주변에 아들과 함께 사는 어느 아낙이 권여경의 밥을 자주 데워 주었다. 이에 권여경은 보답의 마음으로 그 아낙의 집터를 잡아 주었다. 후일 그 집의 가세가 번창하였고 1759년(영조 35)에 영조의 왕비가 된 김한구(金漢耈)[1723~1769]의 딸 정순 왕후의 생가가 되었다고 전한다.
마지막으로, 반정재에서 우무산을 넘어 마중리로 가는 고갯길의 이름에 얽힌 전설이다. 이곳을 ‘중고개’라고 부르는데, 권여경이 반월정을 짓고 살 때에 이 고개를 넘어오던 어느 승려가 근방의 아이들에게 “권 병사 댁이 어디냐, 저 커다란 집이 권 병사 댁인가?” 하면서 묻고 또 물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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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던 종이품(從二品) 서반 무관직이다. 1466년(세조 12)에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고친 이름이다. 정원은 경기도(京畿道)에 1원, 충청도(忠淸道)에 2원, 경상도(慶尙道)에 3원, 전라도(全羅道)에 2원, 황해도(黃海道)에 1원, 강원도(江原道)에 1원, 함경도(咸鏡道)에 3원, 평안도(平安道)에 2원 모두 15원이었다. 1472년(성종 3) 관찰사(觀察使)가 1원씩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겸하면서 제도가 확립되게 되었다.
7명의 전임관(專任官)이 임명되었는데, 그들을 단병사(單兵使)라 하였으며, 그 밖에 관찰사가 겸하는 겸병사(兼兵使)가 8도에 1명씩 있었다. 경기‧강원도‧황해도에는 단병사가 파견되지 않았으므로 관찰사가 겸병사로서 그 도의 군대를 통할하였다. 1593년(선조 26)부터는 황해도에도 단병사를 두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16명의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었다.
병마절도사는 아래 병마우후(兵馬虞侯:從三品)와 군관들, 그리고 많은 아전‧노비‧공장(工匠)들을 거느리는 한편 유방군(留防軍)을 통솔하였는데, 병영이 설치된 곳을 주진(主鎭)이라 하였다. 보통 무신으로 덕망을 갖춘 자가 임명되었고, 임기는 2년이었다. 함경남북도의 병마절도사는 각각 북청부사(北靑府使)와 경성부사(鏡城府使)를 겸하였다.
병마절도사는 평상시에는 지방군의 무예훈련과 습진(習陣), 무기의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軍裝) 점검, 성보(城堡) 등 군사시설의 수축 등을 엄격히 살펴서 국방 태세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야 했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시에는 군사를 동원하여 조치를 취한 뒤 중앙에 보고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국방(國防)뿐만 아니라 도민에게 해를 끼치는 맹수를 잡거나, 도적을 체포하고 내란을 방지‧진압하는 일도 병마절도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조선시대 각도 수군(水軍)을 총지휘하기 위하여 두었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 서반 외관직(外官職)이다.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를 1466년(세조 12)에 고친 것이다. 인원은 경상‧전라‧함경도에 각 3원, 경기‧충청‧평안도에 각 2원, 황해‧강원도에 각 1원씩 있었다. 1원의 경우는 그 도의 관찰사가 정례대로 겸임하였다. 2원의 경우 1인은 관찰사가 겸임, 나머지 1인은 평안도에서는 병마절도사가 겸임하였고, 경기와 충청은 전임무관(專任武官)이 임명되었으며, 3원의 경우 1인은 관찰사가 겸임하고 나머지 2인은 함경도에서는 남북병마절도사가 각각 겸임하였고, 경상‧전라도는 좌‧우도에 각각 전임무관이 임명되었다.
수군절도사는 예하의 진(鎭)‧포(浦)‧보(堡)와 그에 딸려 있는 전함(戰艦)과 관원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從三品), 우후(虞侯:正四品),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從四品), 만호(萬戶:從四品), 권관(權管:從九品), 별장(別將:從九品) 등을 통솔하였다. 교동(喬桐)‧보령(保寧)‧동래(東萊)‧거제도(巨濟島)‧순천(順天)‧남해(南海)‧옹진(甕津) 등은 유명한 절도사의 수영(水營)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각 도의 수사가 진관체제(鎭管體制)에 의해 몇 명의 수군절제사 또는 첨절제사가 관할하는 거진(巨鎭)을 통하여 만호가 관할하는 제진(諸鎭)의 수군을 지휘했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을 겪는 도중인 1593년(선조 26)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설치되었고, 1627년(인조 5) 경기지역 해안의 국방 강화를 위해 경기도‧황해도‧충청도 수군을 통할하도록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을 설치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경상우수사가,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는 경기수사가 겸직하였다.
수사의 임기는 2년이었으며, 처음에는 중앙의 관직을 띤 채 파견되다가, 1477년(성종 8)부터 중앙 관직을 겸하지 않게 되었다. 병마절도사와는 달리 거의 모두 무신으로 임명했는데, 조선 전기에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가 수군절도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수군절도사를 거쳐서 병마절도사로 승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895년(고종 21) 기존의 군영이 모두 폐지됨으로써 수군절도사도 소멸되었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위 지도는 일제시대였던 1920년도에 제작된 지적도 일부이다. 일제시대에 행정구역명으로 지어진 이름인 정미면이 표시되어 있고 여기에 편제된 매방리, 우산리, 하성리, 산성리, 그리고 수당리, 봉성리, 덕삼리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런 구역편제는 대한민국 독립 이후 바뀌지 않았고 서산읍이 서산시로, 당진읍이 당진시로 바뀐 후로도 지속되었으나 다만 1950~1960년 사이에 정미면은 서산군에서 당진군으로 그 소속만 바뀌었다.
이 지도를 보면 괄호친 동리명이 행정구역인 동리명과 섞여 쓰여져 있는데, 예컨대, 葛洞, 夢梅洞(목매울), 鉢伊坊里(빨래방), 下烽里, 壽洞(수골), 上烽里, 三相坪 등은 일제가 새로이 이름지은 각 동리명 이전의 이름들인데 이조시대에는 한자문화시대였지만 지역 동리의 이름은 우리말로 불리워 졌던 것을 한자를 음역/의역하여 썼기 때문에 사실상 우스꽝스러운 동리명들이 괄호 안에 각각 적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옛 고유 동리명말고도 곳곳 고을, 모퉁이, 고개, 물가 등에 고유 동리명이 많이 남아 있어서 화산세보 내에 선조들의 산소 위치를 정확히 찾으려면 옛 고유 동리명을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지도 정보 조사 및 제공: 明漢 (일산, 40세, GLSC-3F2, 2024)
https://www.familysearch.org/photos/artifacts/163735219?cid=mem_copy
병사공 휘 餘慶 산소 (충남 당진 석문 삼봉 기시미), 종중묘지로 이장하기 전의 근경사진
*FamilySearch, FamilyTree 공의 ID 상세기록에 첨부되어 있다.
사적 서산 해미읍성 (瑞山 海美邑城)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 검색]
서산 해미읍성 (瑞山 海美邑城)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