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큰 문중은 고려시대에 최고의 양반가문으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며 크게 번영 발전하여 서기1100~1200년간에 즈음에 제10세 항렬에서 지손枝孫의 수가 상당히 늘어나서 후대에 15개 支波로 이름을 붙혀 조직하게 되었다. [안동권씨 15계파/중시조 분류표 참조]
우리 시중공파는 이 중에서 9번째 분류에 위치하는데 文純公(휘尙夏 1641~1721)께서 실전부분을 정리하여 자리매김하신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세월 속에 우리 문중의 발전과 번영으로 서기1300~1400년간에 즈음하여 시중공파는 제20세 항렬에서 그 지파를 다시 분류할 필요성을 인식하여 예조정랑공파, 이조정랑공파, 그리고 양평공(화천군)파로 세분화하여 최근에 족보출판을 별도로 시작하였다 (2차지파).
우리 이조정랑공파 자손들은 그 분파과정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살피고 그 자리매김된 위치를 잘 이해하기로 하자.
이조정랑공 세종 己未親試(1439, 문과) 과거급제 리스트 원부:
이조정랑공 휘琦께서 세종21년, 1439년,에 실시된 己未親試 과거문과에서 병과4등 으로 급제하시어 급제방목 원부가 왼편과 같이 실록으로 전해 온다.
같은 과거에서 을과에 급제한 보한재保閑齋 신숙주(1417~1475)의 이름도방목에 보인다.
이조정랑공 세종 己未親試(1439, 문과) 과거급제 세부사항 요약기록:
위의 己未親試에서 급제하신 이조정랑공 휘琦의 인적정보 및 그 과거시험과 관련된 정보를 요목별로 정리한 상세정보이다.
책문策問과 이학理學의 논술시험이었다는 것, 그리고 공께서 문소전직文昭殿直을 거쳐 兵曹正郞의 직무를 행하실 때의 또다른 급제임이 나타나 있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예종(제8대 임금)편에 보면 왕께서 공신책봉을 명한 교지(예종실록 5권, 예종1년 5월20일, 경회루, 1469년 성화5년)가 나와있다.
공신책봉은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을 필두로 하여 花川君께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록을 하사하셨는데, 미루어 보면 이 기회는 세조임금 서거후 예종임금께서 즉위하신 원년으로서 당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장군 남이南怡 등 신진세력이 上黨君 한명회韓明澮 등 훈구파와 알력상태에 있다가 신진세력이 역적모의 옥사로 결론나는 시점에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공께서 추충정난익대공신으로서 확고한 공신세습의 지위를 보장받으심으로써 우리 후손들에게 오늘날이 있는 것이며 이때의 공의 현명한 판단과 정치감각 그리고 모나지 않고 조용한 뛰어난 처세술로 임금과 조정에 충성하신 그 위업을 제대로 배워야하겠습니다.
아래에 조선왕조실록 해당부분중 화천군 휘瑊 공의 공신책록 부분만 발췌하여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료 검색에 수고한 明漢, 40세, 군께 감사합니다)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승정원 도승지(行承政院都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經筵參贊官) 홍문관 직제학(洪文館直提學) 상서원 정(尙瑞院正) 화천군(花川君) 권감(權瑊)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그대에게 명하여 말[言]을 출납(出納)하게 하니 진실로 기회(期會)에 응하는 양필(良弼)이었으므로 의지하였고, 나를 막아주어 난(難)을 평정하는데 하물며 세상을 덮을 만한 수훈(殊勳)을 세우지 아니하였는가? 어찌 정포(旌褒)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여 힘써 보답(報答)하지 아니하겠는가? 생각건대, 경은 성품가짐이 충직(忠直)하고 마음가짐이 온순(溫純)하도다. 식견(識見)이 해박(該博)하고 통달(通達)하여 일찍이 시서(詩書)의 교훈(敎訓)에 따랐고 지기(志氣)가 원대(遠大)하여 본래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쌓았도다. 벼슬길에 오르니 동료(同僚)들이 그 능함을 양보하였고, 경조(京兆)586) 에 참여하니, 송사(訟事)하는 무리들이 그 손을 빌리기를 청하였다. 드디어 소고(昭考)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이에 특별히 권련(眷憐)을 받아, 문득 은대(銀臺)의 우두머리로 뽑혀서 출납(出納)하기를 오로지 진실하게 하였고, 매양 윤음(綸音)을 가까이에서 받들고 계옥(啓沃)함이 널리 많았도다. 간주(簡注)587) 하기를 더욱 깊이 하고, 의지하여 맡기기를 더욱 돈독히 하였도다. 내가 상(喪) 중에 있게 되자 경(卿)을 그대로 대언(代言)으로 삼으니, 가모(嘉謀)와 가유(嘉猷)가 있으면 반드시 진술(陳述)하니 약석(藥石)에 비(比)하겠고, 오직 일덕 일절(一德一節)로 서로 도우니 복심(腹心)에 비기겠도다. 생각지도 않게 조아(爪牙)와 같은 신하(臣下)가 몰래 주액(肘腋)의 변(變)을 꾸미니 이미 누란(累卵)의 형세를 이루어서 화(禍)가 박부(剝膚)588) 에 미쳤을 뿐만 아니었는데, 다행히 천의(天意)가 마음을 달래고 성문(星文)으로 경계(警戒)를 보이는 데 힙입어 역적(逆賊) 왕망(王莽)이 비록 그의 궤휼(詭譎)한 자취를 감추었으나, 역적 동탁(董卓)이 스스로 그 흉모(兇謀)를 누설하였도다. 내가 바야흐로 변(變)을 듣고 마음을 경계하고, 경(卿)은 오직 충성을 일으켜 계책을 협찬(協贊)하매, 급히 체포하여 그 당(黨)을 모조리 묶었고, 국문(鞫問)하기를 밝게 하니 모두 그 정상을 자백하였도다. 효경(梟獍)과 같은 무리를 조용히 진멸(殄滅)하니 하늘에 넘치던 분침(氛祲)을 쓸어 없애고, 큰 복조(福祚)를 위태한 데에서 부지(扶持)하여 세일(洗日)의 공(功)을 이룩하였도다. 상(賞)의 은전(恩典)을 논하는 데 누구를 먼저 할 것인가? 떳떳한 전장(典章)을 거행하기를 감히 뒤로 미루겠는가? 이에 경(卿)을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1계급을 뛰어 올리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世襲)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아니하게 하였으며, 자손(子孫)은 정안(政案)에 기록하여 이르기를, ‘익대 3등 공신(翊戴三等功臣) 권감(權瑊)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犯)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반인(伴人) 6인(人)과 노비(奴婢) 8구(口)와 구사(丘史) 3명(名)과 전지(田地) 80결(結)과 은(銀) 25냥(兩)과 표리(表裏) 1투(套)와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손과 발이 되어 머리와 눈을 호위(護衛)하였으니 내가 이미 이정(彝鼎)에 새겨서 잊지 아니하고, 고굉(股肱)의 신하로 삼아 국가에 기둥이 되게 하니, 경은 더욱 대려(帶礪)로 기약하여 변하지 말지어다."하였다.
敎推忠定難翊戴功臣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弘文館直提學尙瑞院正花川君 權瑊曰:
命汝納言, 允倚應期之良弼; 扞我戡難, 況樹蓋世之殊勳? 盍擧旌褒, 用懋酬報? 惟卿秉性忠直, 操心溫純。 識見該通, 早服詩書之訓; 志氣遠大, 素蘊經濟之才。 登仕版而同僚讓能, 參京兆而訟輩請借。 遂遇知於昭考, 乃特紆於眷憐, 俄擢長于銀臺, 出納惟允, 每昵承于綸音, 啓沃弘多。 簡注尤深, 倚任益篤。 逮予在疚, 仍卿代言。 有嘉謀嘉猷而必陳, 比之藥石; 惟一德一節而相輔, 擬諸腹心。 不意爪牙之臣, 陰構肘腋之變, 勢已成於累卵, 禍不啻於剝膚。 幸賴天意誘衷, 星文示戒, 逆莾雖秘其詭迹, 賊董自洩其兇謀。 予方聞變而戒心, 卿惟奮忠而協策, 捕之急悉繫其黨, 鞫之明盡輸其情。 殄梟醜於從容, 坐掃滔天之祲。 扶鴻祚於臲卼, 立成洗日之功。 論賞典而誰先, 擧彝章而敢後? 肆策卿爲翊戴三等功臣, 立閣圖形, 樹碑紀功, 爵其父母妻子超一階,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則記于政案曰, ‘翊戴三等功臣瑊之後。’ 雖有罪犯, 宥及永世。 仍賜伴人六人、奴婢八口、丘史三名、田八十結、銀二十五兩、表裏一套、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爲手足而衛頭目, 予旣銘彝鼎而不忘; 作股肱而柱國家, 卿益期帶礪而勿替。
휘 극중 光州 역대 인물소개 자료에서 발췌
https://bit.ly/4gadnZz
[디지털광주문화대전]